조두환의 시 160

어느 화난 날

얼핏 그가 내던진 말이 호수 위를 튕기는 물수제비처럼 잔잔한 가슴을 친다 칭찬에만 길들어 있던 나 갓 어미 뱃속에서 나온 송아지마냥 안절부절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데 그래도 뱃심은 능구렁이 아닌 척 작은 미소로 위장하면서 내미는 작은 앙가픔의 카드 스마트폰에서 그를 지워버리고 기억의 공간을 비워 보지만 어라 갈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한참 후, 마음 속 모닥불이 꺼지고 가슴에 제대로 바람이 통하게 되니 그제서야 더 이상 보이지 않네.

조두환의 시 2022.02.25

셋방살이

잠시 세들어 사는 이 세상 주인이 나가달라면 언제라도 미련없이 떠나야 하지 않나요 틈틈이 이삿짐을 챙기다 보면 왜 이리 쓸데 없는 것에 붙잡혀 살고 있는지 왜 이리 나날을 안달하며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고 한숨 짓게 되지요 나 없는 나로 살아 온 세상 그러니 일을 당하여 허둥댈 게 아니라 늘 미리 준비하며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울타리에 쌓인 뽀얀 먼지 털어내며 쓰러져 있는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지요.

조두환의 시 2022.02.24

소나무의 기상

고암절벽 기울고 이지러진 틈새 땅에 안간힘으로 몸 비틀어 뿌리를 내렸다 온갖 풍상 견디며 하늘 향해 정의롭게 매양 몸을 낮추고 굽히며 살아 왔으니 몸 휘인 건 회절이 아닌 굳셈의 뜻이라 죽어서 긴 세월 곯은 몸 탄조각이 되어 엄청난 눌림 견디어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듯 불사조의 날개 달고 온 너희 가슴 속에는 저 높은 하늘의 뜻 모두 담겨 있으려니 보는 자 절로 행복으로 되살아나지 않으랴.

조두환의 시 2022.02.24

초록감성

초록은 만남으로 열리는 빛의 축복 하늘과 땅의 만남이 아니라 공기와 샘물의 만남이 아니라 손과 발의 만남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만남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 나오는 바람처럼 창조주의 손에서 빚어지는 인간처럼 무거움에서 풀려나는 해산의 기쁨처럼 하나에서 자라난 또 하나의 축제 생명의 힘 거친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낸 상록수의 꿈.

조두환의 시 2022.02.23

그리움의 노을

당신을 만난 것은 번갯불 충격이었습니다 혼자뿐이던 이 세상에서 그리움을 알게 되고 기다림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속에서 강고해진 진흙덩이가 가뭇없이 녹아 없어지듯이 고집스러운 나의 마음은 눈물 많은 당신의 가슴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실비단 고운 노을빛 하늘 아래 이제 더 큰 기다림을 시작합니다 버드나무 휘날리는 뜨락에서 내 마음 속의 그리움은 화선지에 풀리는 물감처럼 기다림으로 자꾸만 번져나가 늘푸른 나무로 자라날 것입니다.

조두환의 시 2022.02.23

남산 샛개울

산 허리춤을 가로 질러 찰랑이며 흐르는 샛개울물 굽이굽이 휘인 도랑길을 왜 저리도 서둘러 가나 오도카니 길목 지키는 노란 창포꽃은 근엄한 남산골 샌님 칼날처럼 세운 이파리로 굳어버린 마음 풀어 헤치나 물길 닿는 저 아랫골 단오절 한마당 잔치에서 여인네들 머리를 감겨 주면서 겨우내 서린 한 풀어 보려나 새들도 봄바람에 장단 놓칠까 물결 따라 노래 부르네.

조두환의 시 2022.02.23

저녁에

무슨 일을 해놓고도 미심쩍고 답답하여 꾸물대기 일쑤다 잊지 않으리라 애써 다짐한 것들도 잠시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쌓아놓은 지식들도 기억의 창고에서 쉽게 꺼내 쓰지 못한다 젊은 날 번뜩이던 지혜와 배짱은 낡은 기왓장처럼 부서져 가는데 쑥쑥 커가는 젊은이들을 곁눈질하며 겨우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면서 젊었을 때 일들을 변명삼아 덧붙여 보지만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예전에 사치로 즐기던 고독이란 것도 이젠 진저리가 나 털어버리려 하니 순간순간 숨 막히는 장벽 앞에서 촌색시처럼 빨개지는 얼굴 늙어가는 게 땅거미 지는 것처럼 싫다 아쉽고 답답한 하루를 보내며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는 일들로 점점 길어지는 이상한 밤이 또 다가오고 있다.

조두환의 시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