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환의 시 160

신문스크랩

수많은 이야기들 가슴에 담고 아침마다 세상소식 전해 주다가 주인님의 별난 취미 대로 이리저리 잘려 나온 자투리 신세 화단 속 꽃들처럼 한군데 모여 있다가 짬이 나면 택함 받아 누리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쁨 그 순간을 기다리며 컴컴한 서가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동안 몸뚱이는 어느새 누렇게 변해가는 때 운 좋게 주인님의 해외 여행길에 따라 나서며 뒤늦은 호사를 누리게 되었나 그 이후 보내진 이역만리 호텔방 휴지통 느닷없이 꼬부랑 낯선 형제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리사이클링 행로가 훤히 트인 이 선진국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던 국제 친선의 노래 지나는 길가 가로수들도 손을 흔들며 맞아주네 나무로 태어나 종이로 살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우리의 환생길 내세에는 무슨 종이로 태어나 무슨 활자의 옷을 입을까.

조두환의 시 2022.03.05

정동길

비 내리는 날이면 혼자 걷고 싶은 길 덕수궁 돌담길 따라 발길 옮기면 아련한 추억으로 샘솟는 옛이야기 지난 세월 숱한 옹이 가슴에 안은 가로수도 다 아는가 손을 흔드네 첫사랑 그리움에 영글던 소년의 꿈 정동의 오솔길에 서면 잃었던 나를 만나네 눈 내리는 날이면 함께 걷고 싶은 길 교회당 종소리 따라 발길 옮기면 새벽노을 비춰주는 그 은총 빛나라 깊은 잠 깨워준 이 나라 근대화의 터전 빨간 벽돌집 신문화 신교육의 횃불이라 가슴에 울리는 사랑의 메아리 소리 정동의 언덕길에 서면 잊었던 우릴 만나네.

조두환의 시 2022.03.05

사이사이

사람이 서로 기대며 산다 해서 '사람 인人'이라 쓴다는데 사이가 좋아야지 사이가 나쁘면 어찌하나 다툼과 미움이 칼날처럼 기대서서 가슴과 가슴 사이사이에 얼음장 찬바람이 불어대면 메마른 쭉정이 하나 매달려 무슨 싹을 틔울 수 있겠나 하늘과 땅 사이에 따뜻한 햇살 기지개를 켜고 따뜻한 눈물 촉촉이 고이면 사이에 사랑이 움트고 사이에 행복이 꽃피리니 모든 것은 사이사이의 일 거긴 삶을 조율하는 공간.

조두환의 시 2022.03.05

11월의 기도

노루꼬리 햇살 무겁게 내려앉은 들판에서 거친 바람결에 이파리 모두 잃고 부르르 몸을 떠는 나무들의 마지막 사푼거림 외톨박이 겨울 나그네가 먼 여행길 보따리를 꾸리는 계절 여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시월이나 저무는 한 해의 장막 속에 묻히는 십이월에 비해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회색 노인의 한숨같은 십일월 '모든 게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달'이라 일컷던 인디언의 지혜가 가슴에 종을 울린다 모든 걸 잃었어도 더 큰 희망을 위해서는 견디고 이겨내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고마운 순간들에 대한 감사의 달 누린 즐거움과 눈앞의 차가운 현실을 낱낱이 헤야려 더욱 꿋꿋이 딛고 걸어가야 할 징검다리 계절 겨울의 강을 안전하게 건너는 소중한 시간 되게 하소서.

조두환의 시 2022.03.05

광야에서

하얀 스케치북 위에 점 하나 찍고 동그라미를 그려서 네모와 삼각형을 덧붙여 바로 세우면 사람이 되나 옆으로 뉘면 칼바람 부는 들판의 가시나무가 되고 앙상한 무화과나무처럼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지팡이도 된다 갈길 아득하고 한치 앞을 볼 수 없어도 육신을 방석 삼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명 따라 살면 거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낙원 가는 길

조두환의 시 2022.03.03

시간의 마음은

시간은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제 몸 되작이며 끊임없이 간다 갑작스런 일이 생겨도 더 서두르거나 늦추지 않고 하늘이 정해 놓은 간격대로 항상 똑같이 간다 시간은 묵언의 수행자 우리가 죽으면 그냥 멈춰 설 것 같지만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도 아무 말 없이 간다 시간은 순한 풀잎처럼 마음 대로 부릴 수 있는 것 같지만 순백의 꽃잎처럼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항상 마음은 하늘에 두고 제 홀로 가고 온다.

조두환의 시 2022.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