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환의 시 160

어버이날에

세 살 때 돌아가시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생각난다며 어린아이처럼 울상이 된 여든이 다 된 친구 서른네 살 대낮처럼 기억 생생하던 때 제 살 궁리에 바빠 병석의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펴드리지 못한 채 여의고만 나 때가 오리라 미뤘던 시간들은 노인이 된 세월의 뒤안길로 아득히 떠나가 버리고 어버이날이 오면 미운 청개구리 새끼들 겨우 사람 흉내를 내보나.

조두환의 시 2020.05.04

아버지

아버지 조두환 선진국의 어느 시립유치원에는 아이 스무 명 중 열여섯이 홀어머니 밑이어서 남자선생 한사람이 모두의 아버지가 되어준다나 우리나라 초등학교에는 남자선생이 너무 적어서 아래 학년쯤이면 으레 여자선생이 전부라니 가까운 장래에 아버지라는 족속이 공룡처럼 멸종해 버릴 거라는 UN의 세계미래보고서가 장난이 아닐 것 같네 남녀로 편가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오히려 둘을 고루 갖춘 양성적 인간이 이상이라는 새 시대의 논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가 골고루 분포된 사회에서 서로 다른 걸 알고 서로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져 사는 길이 고리타분한 칸막이 이분법만은 아닐 것 같은데 어찌하나 자꾸만 설 자리를 잃어만 가는 아버지들 큰 것만 노리는 허황된 남자들이 자초한 일이라서 딱히 할 말은 없지만 ..

조두환의 시 2020.05.03

작은 상그릴라

말이 다한 곳에 음악이 있노라고 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목소리가 가슴에 스미는 때 텅 빈 이 세상을 시와 가락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순한 마음들이 모였습니다 영과 혼이 마주하는 하늘 잠자리에서 별들 깨어나는 소리 들리면 우리 모두 지고 온 등짐 내리고 온 세상의 시간들 불러 모아 가슴에 품어 보렵니다 여름날 산골짝의 냇물처럼 콸콸 쏟아낼 삶의 이야기 나누며 조율하며 노래하는 ‘세 쁘띠 살롱’* 작은 상그릴라 되게 하소서. * Ce petit salon

조두환의 시 2020.05.02

울름 대성당*

우람한 몸집 한눈에 담을 수 없어 꼭대기만 올려다보노라니 층층 삼각첨탑 위로 마침 구름이 몰려와 소리 없이 속삭이고 있네 둘은 가만히 그렇게 속마음 다 쏟아놓았거나 아예 다 감추었거나 이제는 새하얀 침묵뿐 모든 걸 알고 있을 도나우 강도 완전 시치미네 구름은 하늘의 몸알리* 사람 눈길 닿기 힘든 이곳에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성당은 그걸 받아 적으려고 연필심 뾰족이 깎아 저리도 높이 서 있는 거네. * 독일 울름Ulm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고딕식 성당(161m) * 몸알리-매우 친한 친구

조두환의 시 2020.05.01

서울로 7017

도심 한복판 하늘을 가로지른 급행 찻길의 추억 1970년에 부름을 받아 도시의 동맥으로 바삐 살다가 2017년에 떠나가면서 하늘뜨락으로 거듭났다 차바퀴 상처난 자국에는 쉼터 그늘막이 내려지고 총총한 빌딩 숲길 따라 곳곳에서 불러 온 꽃과 나무들이 새천년 둘레길을 열었다 땅거미 지는 저녁이면 사슴 같은 사람들 몰려와 피아노와 노랫소리 시냇물처럼 흘려보내며 목마름 달래고 그리움 피워내는 아 여기는 사람이 다시 주인이 된 사랑의 오솔길이다.

조두환의 시 2020.04.21

아샤펜부르크의 새벽

아샤펜부르크의 새벽 하얀 밤 지새운 가로등이 밝아오는 날빛에 기진해가는 아샤펜부르크의 새벽 불쑥 뛰어든 이방인의 잰 발걸음에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도시가 몸서리를 치는가 밤하늘의 별들 사라진 뒤로 환히 불타오르는 아침 노을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가슴에 번지는데 요하니스부르크 붉은 성채 뜨락에선 선홍빛 하늘 춤사위가 한창이네 희미한 낮별 같은 이 나그네에게도 장밋빛 전설 한 다발 안겨주려나.

조두환의 시 2020.04.19

남해 지족에서

남해 지족에서 솔뫼 조 두 환 남해 섬 한 모퉁이 파도조차 사라진 바다와 텅 빈 멸치잡이 죽방렴 고동소리 없는 조각배들만 바람결에 졸고 있는 마을 한자로는 지족只族 이라 쓴다지만 얼핏 욕심 없이 만족을 누린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곳 표주박 같은 면사무소 갈래 길 따라 도토리 키 재듯 줄선 집들은 넘침일랑 모르고 있기에 모자람도 아예 모르는가 정적을 포대기로 삼고 곤한 아기잠을 자고 있다 하늘보다 태평한 비단결 바다에도 언젠가 파도 굽이칠 날 있을까 섣부른 예단마저 부끄러워 봄 햇살 살가운 둑길에 멈춰 서 산들바람에 기지개를 켜니 아 가슴 깊이 밀려드는 기꺼움이여.

조두환의 시 2020.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