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발걸음으로 71

지붕

지붕경치가 유난히도 고운 헨트* 시내의 하늘마당 저 아래엔 필시 온갖 삶의 이야기들이 뜨락의 사과나무처럼 익어가고 있을 거야 외로움에 젖은 사람들이 소곤소곤 주고받는 중세의 이야기 비단 물결같이 굽이쳐 흘러 두근거리는 가슴에 담기고 물결 위의 빈자리를 찾아 이 밤으로가는 발길을 옮길 거야 아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이 사람들의 꿈 속에 깃들어 온 우주로 퍼져나가 기적의 꽃을 피우고 있을 거야. * Gent. 헨트 또는 겐트라고 함. 벨기에의 중세 운하도시.

상 마르코 광장*

결코 기울지 않으리라던 자존의 도시 고딕 기둥 위에 걸터앉은 둥근 지붕 그 안에서 반짝이는 금빛 모자이크 그 영광 찬란하구나 해가 갈수록 조금씩 가라앉는다는 도시는 옛 상선들의 물길마저 사라지고 정령들이 숨어 노닐던 저 너른 바다에는 고대 그리스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 격정의 세월들이 고갸 숙인 채 파도에 쓸려다니며 슬픈 울음을 우나 청동마 네 마리가 한결같이 버티고 있는 정문 입구에는 끼룩끼룩 구구 비둘기 떼 우는 소리 사람들과 날짐승들이 모여 서로가 누구인지 모를 저녁이 되면 이상한 축제를 벌인다 구름 같이 몰려오는 물결이 바닷바람에 몸을 적시며 무거운 밤의 크기를 계량하는가 성 마르코의 유체가 아프게 느껴지는 광장의 시간 베네치아 온 천지는 침묵하던 바다의 비밀을 터뜨린다. * 830년 대 마가의 시..

리보르노*에서

태양을 머리에 이고 샤갈의 진청색 바닷물에 발목을 담근다 자연 속 자연이 퍼져나가는 소리 너른 바다가 하늘을 따라 올라갔어도 사연 한 줄 남기지 않고 뭉게구름만 품은 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향수로 내려온다 어느 것이든 가슴을 통하지 않고는 보이는 것 없는 지중해 땅에 살면서 하늘을 빚어낸 미켈란젤로의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리보르노는 세상이 열리기 전 바로 그 빛깔 그 모습이다. * Livorno.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 작은 어촌. 미켈란젤로의 고향, 셸리와 바이런의 머물던 저택이 있다.

베네치아의 오후

니케 여신이 휘날리던 기세쯤일까 하늘을 가득 채운 태양의 열기에 역사가 기적처럼 기울어가고 해마다 조금씩 바닷물에 잠기어 간다는 도시 햇살이 저 심연의 끄트머리로 사라져가는 오후 헝클어진 수로의 뒤안길로 버려진 소원들을 모아 베네치아는 그리움의 불길 지피우는가 지난날 바다를 지배하던 제독들은 도열한 섬들을 향하여 빛 발한 깃발을 휘날린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절망의 나락에서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는 베네치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저마다 아침바람을 소환하여 쉰 목소리를 가다듬고 았다. .

베네치아의 저녁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람들의 물결 사라지고 비둘기 떼마저 떠나간 텅 빈 광장 운하를 가로지르는 리알토 다리*의 난간 사이로 반짝이던 태양 해바라기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던 바람결도 손을 놓았다 번잡하던 한낮의 연ㅇ광들이 세상 먼지 다 씻어가버린 검푸른 물결 따라 밤으로 가는 저녁이 허허로운 모습으로 들어와 새로운 축제를 위한 오르페우스의 현을 켠다. * 베네치아의 중심수로의 400여 개 다리 중 중심을 이루는 다리.

베네치아의 고독

저 세상 끝에서 여기까지 저 옛날 시작에서 오늘까지 한결같다 대양을 향해 외치던 로마 병정의 함성도 물의 정령으로 살아서 돌아와 있다 거리와 광장에 부잣집 잔치마냥 넘쳐나던 웃음 이제 벽처럼 막아선 철옹성 적막 쨍쨍한 햇살 짙은 그림자 드리우는 이 가을의 베네치아에는 내 누이의 기다림보다 더 길고 깊은 고독이 있다.

베네치아의 물길

물 흐르듯 순조롭다는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베네치아에 와서 더욱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리 길을 걸으면서 물길을 보고 삶의 흐름도 느끼고 외줄기 목숨이 여러 갈래로 퍼져서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흩어지는 역사도 바라볼 수 있으리 이따금 물이 빠른지 삶이 빠른지 견주면서 들끓는 격정 속에 덧붙은 근심마저도 까맣게 잊고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으리 매사를 너무 계산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라 가르치는 베네치아의 물길 언제나 잔잔히 흐르네.

베드로 성당에서

사람의 지혜가 하늘에 닿을까 부챗살 추녀 밑에 스민 휘둥그런 미소 미켈란젤로의 '천사'가 날마다 살아서 빛으로 내려오는 곳 무슨 고백을 하기 위하여 어두운 대리석에 발을 딛고 그리도 오래 서 있는 걸까 가야바*의 뜰에서 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인하리라던 예언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배반의 사람 그러나 회개 위에 회개를 포개며 진정 가슴을 울리던 그처럼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푸른 나래 펼치며 우리도 다시 바로 설 수 있을까. * Caiaphas. 기원 18~36의 유다 대제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