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의 자목련 채근 심한 봄햇살 때문인가 시간들에 부딪는 바람 때문인가 가지마다 스미어 있는 시린 한이 성급한 옷차림으로 봄맞이를 나왔나 차가운 호수를 품어 안은 가슴이 지중해의 바람으로 영그는가 아니면 회심의 미소 얼굴에 스칠 때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냥 꽃으로 피어났나 저 먼 세계의 소원들을 모두 얼굴에 담고 있는 자목련 나뭇가지에는 어찌하여 내 고향 동방의 꿈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까.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스위스 연방국회의사당 앞에서 스위스 연방공화국의 으뜸도시 베른 연방국회 의사당, 그 거창한 이름에 비해선 모든 게 보잘 것없는 한낱 이웃학교 강당쯤인데 작고 좁다란 길 그 뒤로 또 작은 언덕길 '아레 강' 훨씬 아래로 죽 내려가 돌팔매처럼 눈길을 세워 올리면 보이지 않던 작은 것들 큰 위엄으로 되살아 나고 골짜기 위로 높이 치솟은 우람한 수직의 질서 장관이 아닌가 마음이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작은 의사당이 그렇게도 편안한 곳이라던가 모두가 이마를 맞대고 의논하기에 좋고 권력을 다투고 휘두르지 않으니 소리 질러 싸울 필요도 없고 남의 가슴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던가 광장 앞에선 매주 한 번씩 야채시장이 열리는데 지저분하다 시끄럽다 탓하는 사람도 없고 겉모양이나 체면 보다는 시민 한사람 한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조용..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눈 내리는 취리히 나서려니 눈이 내리는 건지 눈이 내려서 나선 건지 이런 눈세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하늘길 시내를 가로지르는 취리히의 하늘빛 전차에 부딪히는 새하얀 눈송이 평화의 동산으로 쌓여가고 있네 그림자 없는 눈길 위로 발걸음 옮기면 하늘의 은총만큼 굵은 눈발들이 순한 목소리로 장단을 맞추고 산동네 지붕 위에선 방울지어 쌓이는 눈송이 성탄의 종소리로 울려 퍼지네.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프리부르* 시 자아네* 강 하나 사이에 두고 독일 말과 프랑스 말이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커뮤니케이션의 별천지 독일 말이 프랑스어 마을에서 프랑스 말이 독일어 마을에서 조금도 낯가림 없이 서로 등 두드리며 산다 섣불리 섞이기를 거부하면서도 함께 힘을 모으며 사는 물 반 고기 반 여기는 스위스의 화계장터 이웃집 사이사이 평화의 풀밭에는 언제나 사랑나무가 자라고 있다. * Fribourg/Freiburg. 스위스의 수도 베른 남쪽 칸톤 푸리부르의 주도. 인구 7만의 가톨릭 중심도시로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언어경계선에 있다.. * Saane. 프랑스어로는 사린 Sarine 강.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베른 미술관에서 발걸음 옮기면 기적처럼 열리는 색깔잔치 그뿐이랴 프레임과 라인이 맞닿은 구도의 한복판 참 형상이 동공 틈새마다 감격을 안긴다 안젤리코, 모네, 세잔느, 클레, 피카소 실눈 뜨고 가늠하는 예술가의 꿈과 사랑으로 가슴을 닦는 관람객의 손길이 손잡고 이웃하는 공간 빛들은 이제 현란한 비파소리 되어 흐른다 홀안 한 구석에는 대가의 붓질을 사모하며 스케치에 빠져 있는 젊은 여인들의 흔들리는 어깨와 등허리 사이에서 감탄의 숨소리가 터져나오는데 이제 그림 따라 눈길이 옮겨가는지 그림이 눈앞을 스쳐가는지 모를 때쯤 모두가 마음보다 커다란 기쁨 가슴에 안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으리.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베른 동물원 있던 자연 허물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새 자연을 만들었다 호랑이 아닌 호랑이가 곰 아닌 곰이 원시림의 추억 모두 버리고 문명의 그늘 아래 우리 안을 쉴 새 없이 맴돌며 이따금 멈춰서 포효한다 울부짖는다 고용된 서커스의 광대처럼 할당된 뭔가 열심히 연출하는 새 자연 속 동물들 갇힌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공간 베른 동물원은 시설 좋은 인간의 놀이터이다. * Bern. 스위스 연방공화국의 수도이자 칸톤 베른의 주도. '곰 Baer'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릴케가 사는 곳 천구백이십육년 해가 저무는 십이월 이십팔일 당신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지만 영원을 사는 당신께서는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천구백칠십육년 해가 기우는 시월 이십칠일 고요한 발리스 언덕 라론의 교회당 위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을 알고픈 동방의 문학도가 당신 앞에 섰습니다 육신이 꺼져 겉삶은 사라졌어도 영혼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하많은 꿈과 생각들을 무엇에다 담고 있을까 괴로울 때 시를 쓴다지만 어둠이 지나고 기쁨이 햇살처럼 비칠 때 당신은 한 줄 시 조각 때문에 피를 흘려 장미로 피어났습니다 그 향기로 우리의 영혼을 닦아주었습니다.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릴케에게 비석 옆 십자가 밑에 저 너른 평야 훤히 트이고 첩첩이 쌓인 삶의 고뇌 허공에 던져버린 채 잠든 삶 "대략적인 걸 증오하던" 시인의 혼으로 살아난 장밋빛 열정 여린 손가락을 찌른 그 가시에 목숨을 바친 당신 죽음을 가지고 산 당신.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릴케의 묘지*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언덕 바위 위 교회당 저녁햇살이 좀처럼 기울지 않는 산비탈을 따라가면 된다 마음이 머물다 바람으로 부는 곳 더 이상 선택이 없는 그 자리에 영원의 이름으로 누우신 당신이여 수염처럼 자란 풀밭 위 비석 모퉁이에 걸린 얼굴을 바라보면 막혔던 응어리가 풀리고 금방 시가 쏟아질 것만 같아라 묶이고 매이는 것이 싫어서일까 세상에 머물게 해준 고마움 때문일까 핏빛 보다 짙게 남긴 삶의 발자국 그 이름에 비하면 잠자리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영원히 손님으로 살다간 세상의 나그네여 당신은 왜 그처럼 수줍게 사셨습니까? 여린 손가락 가시에 찔려 죽음을 바친 죽음으로 삶을 사랑하던 당신이여 비석 옆 십자가 밑에 "순수한 모순으로" 잠들며 피어난 장미 한 송이 참을 수 있는 아픔 이상 아..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2
레만 호*에서 세상 이름 모두 사람들처럼 남성, 여성, 중성으로 나뉘는 독일어의 낱말들 그 중에서 제에란 단어는 잔잔한 호수를 뜻할 때 남성이고 거친 바다일 때 오히려 여성이라서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다 로잔에서 제네바까지 한 시간 넘어 기차를 타고 가면서 대양과 같은 호수를 보고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떤 화가의 물감으로도 그려내기 힘들 하늘 너비 물빛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기쁨이나 슬픔 따위도 무심한 쪽빛 물살의 한가닥 저녁노을 번지고 조개구름 퍼질 때 호반의 레스토랑 테이블마다 마음과 마음들이 나라와 나라들이 정직하게 만나서 통크게 함께 흘러가는 곳 남성 호수와 여성 바다의 가늠 자체가 이제 가슴에 와 닿네. * Lac Leman. 길이 195km, 면적 582km2. 초승달 모양을 한 알프스 산지 .. 나그네의 발걸음으로 2022.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