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발걸음으로 71

꽃말

그냥 붙여진 이름은 아니려니 겹겹 꽃잎 안에 쌓인 소리 잃은 이야기들 낱말로 자라나 마음에 꽃을 피운다 밀려드는 근심 땅속에 묻고 끝내 잊을 수 없는 것들은 긴 줄기로 자라나 납죽한 미소로 앉아서 견디고 견디어 지켜낸 빽빽한 침묵 모두 서로 기대고 포개어지며 자기 설 곳을 찾는다 슬픔이 구름처럼 몰려 와도 웃음으로 키워져 얼굴에 가득 드리우리니 낱말들은 저마다 향기를 품고 꽃잎으로 피지 않으랴.

어둠의 강 저편

꼬부리고 잠을 자고나니 가슴에 달려 있던 멍에들이 사라졌다 꿈길에 거친 바람 불고 망각이 햇살처럼 쏟아질 때 나를 어디에 벗어놓았던가 어둠의 강 저편 시간의 여물을 씹으며 사념의 숲을 걸을 때 자작나무 숲 사이에서 샘물을 마신다 목마름을 달랜다 일상의 낱말들이 민들레 꽃씨처럼 퍼진 들길을 걸으면서 답장 잃은 안부편지같이 쑥스러이 매달려 있는 꽃술을 보네 어둠 짙은 꿈속에서는 진정 밝다고 하는 것도 어두워지기 위한 것임을 알겠다.

그리움

그리움에 불이 붙는다 자꾸만 나를 태운다 끝내 건널 수 없어 서성이며 맴도는 다리목 이방異邦의 빛나는 계절에 파란 손길 내미는 당신 향해 목마른 눈인사 던진다 황톳빛 슬픔이 타오른다 철 따라 세월 따라 도란도란 꽃 피는 고향 이야기 봄 쑥갓내, 여름 열무맛, 가을 대추꼴, 겨울 홍시빛 고랑 속을 비집고 나오는 비릿한 어머니의 젖 냄새.

당신은 누구이신가?

헝클어진 혈맥처럼 가로로 세로로 모두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 다시 한길에서 만나게 하는 당신은 누구이신가? 흐트러지는 걸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만 가는 길 천리안에 담는 바람결 같은 당신은 누구이신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왔다가 가면서 한 가닥씩 나를 버려서 나를 성장하게 하는 당신은 누구이신가? 그대가 남기고 간 미소만큼 조용히 품에 안았다가 별이 되기까지 진정 기다릴 수 있게 하는 당신은 누구이신가?

끊임없이 줄을 그으며

살아가면서 거미처럼 끊임없이 줄을 긋는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를 가르고 너희라는 이름으로 나와 너의 울타리를 두른다 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수많은 만남을 계획하고 수많은 헤어짐도 감행한다 그런 중에 마음 모진 자만이 의기양양 행복이라는 또 다른 줄을 긋는다 아, 그럴수록 한 복판에 우뚝 세워지는 나 고독은 빙빙 팽이처럼 돌고 총총 걸음으로 쓰러지면 알게 될까 우리가 그어놓는 줄이란 향수라는 동그라미뿐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