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아이들 앙상하던 느티나무 어깨 품에 파릇파릇 이파리 돋아나는 봄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 와 사랑방 보금자리를 편다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날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늘 마당 온 동네 조무래기들이 몰려 와 술레잡기 놀이터를 연다 새와 아이들은 하늘의 메신저 천둥번개 비바람 하늘 목소리 따라 밥먹으라 부르는 엄마 목소리 따라 하던 일 뚝 그치고 즐달음질 친다. 조두환의 시 2022.02.22
꿈 어떻게 예까지 올라왔나 아득히 높은 빌딩 꼭대기 천애절벽 낭떠러지야 높이 높이 오르는 날 보고 환호하는 저 눈길들에 취해 그저 앞만 보고 올라왔지 이제 정신차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개미같은 사람들 거미줄 같은 길들 빙빙 도는 아찔 세상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이 절망의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날 흔들어 깨우는 것뿐 아, 거품처럼 꺼지는 꿈이여 그 때문에 난 살 수 있었네. 조두환의 시 2022.02.22
히어리 산등허리 외진 곳에서 기다림을 숙명으로 살아가는 남도의 수줍은 봄새악시 겨울 한철 긴긴 추위 가지마다 눈꽃 피워 거뜬히 견디어 내지만 짐짓 성미 하난 안달방구 이파리가 새눈 뜨기도 전에 노란 종방울 먼저 내미네 사방시오리 곳곳에 번지는 종소리 히어리란 이름도 그래서 얻었다나 아, 받기보다 베풀기 좋아하는 걸판진 마음의 우리 꽃나무 배달겨레의 꽃이여. 조두환의 시 2022.02.22
고베의 저녁별 바다 위의 태양 그 사이로 그리움의 노을 묵직한 바람 아무 소리도 없다 천년에 한번 있을까 경련으로 온통 찢겨간 대지의 통절한 기억 침묵으로 견딜 수 없어 망각으로 잊을 수 없어 표정마저 내버렸나 소금기바람 부는 부둣가 뒤로 가물거리는 저녁별 슬픔을 지울 마지막 미소일까. 조두환의 시 2022.02.21
고베에서 상아빛 햅쌀을 국향에 절여 정한수로 빚는다는 명품 사케 키쿠마사무네* 뽐내는 정성의 전설길을 따라가다가 문득 길 건너 응달밑에 납죽 쪼그려 앉은 일본 집 두어 채 흘리는 눈길에 딸려 오네 얼마 전 도시를 온통 삼키고 간 호된 쓰나미 광풍 머리에 되살려보니 질경이처럼 살아 숨쉬는 이 작고 호졸곤한 하꼬방 놀랍기만 하네 도시의 진정한 전설길 탐사는 바로 이 오뚝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 菊正宗: 무사 타데 마사무네 가문에서 제조하는 350년 전통의 일본청주 조두환의 시 2022.02.21
용주사에서 누리의 효기孝氣가 산기슭 바람타고 내려와 풍경을 울리나 무심한 시간 속 아름다운 생명들은 꽃이 되고 수많은 인연들은 조약돌이 되어 소리 없이 세월을 지키나 대웅전 너른 마루턱 하늬바람결에 눈감으면 보이는 춤사위 "얇은 사沙 하이얀 고깔 사뿐히 나빌레라"(조지훈의 중) 벼리고 벼린 시인의 입김이 수행자의 마음을 적실 때 시원히 터지는 죽비소리 시詩는 말言의 절寺이다. * 용주사.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찰. 854년 신라 문성왕 16년 창건. 소실 후 조선 정조 22년 복원. 시인 조지훈이 이곳에 머물면서 승무를 보고 동일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조두환의 시 2022.02.20
새벽 빛의 씨앗 어둠의 품속에서 자라서 파란 면사포를 쓴다 숲 속 나무들 아직 잠자리에 있는데 어스레한 땅 위에 바람과 이슬이 기다리고 있다가 하늘 창을 연다 동이 트면 초록빛 들판에 만물이 깨어나는 소리 들릴까 날마다 거듭되어도 새벽의 역사는 언제나 새롭다. 조두환의 시 2022.02.20
거울 있는 세상 그대로 있다 다른 마음으로 다가서면 달리 있다 실實과 허虛의 내를 건너 피彼와 차此의 언덕을 넘어 진실이 진실하게 익어가는 벌판에 슬기롭고 아름답게 쌓아올린 세월 그대로 있다 모두가 찾아나서는 제 모습은 자기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 눈을 바로 뜨고 볼 때 거기에 있다. 조두환의 시 2022.02.19
세상 나그네 꿈자락 가슴에 안고 언제나 가뿐하게 구름처럼 머물다가 이미 알고 있는 침묵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길눈 밝은 세상 나그네 저녁이면 나무 등걸의 실바람처럼 기웃기웃 제자리를 맴돌다가 가뭇없이 떠나버리는 홀홀한 인생. 조두환의 시 2022.02.16
말 꽃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리 아름다울까 꽃이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이리 향기로울까 아무 말 없이 핀 꽃을 어여쁘다 말하고 나면 그 소리 올가미 되어 그냥 시들지 않을까 꽃이 그리 고운 건 오직 침묵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려니 오직 소리없이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려니. 조두환의 시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