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70

요코하마 부두

가을비에 젖는 요코하마 부두 저 지평선 위로 하늘의 먹구름 내려와 넘실대는 먹물바다 세상 열리던 날 혼돈과 어두움의 거친 물굽이 오가던 순항유람선도 섬처럼 멈춰 섰다 동이 트자 닫혔던 하늘 문 열리고 태양도 제자리 찾아 밝은 미소 지으니 온 누리 온 빛깔 가슴 펼치는 바다 아, 이 세상 첫 그리움 동방의 꿈과 서방의 빛 파도로 밀려와 만나던 곳 붓길 마르기 전 캔버스의 바탕칠처럼 오늘도 그때의 바람이 분다.

동그라미 2022.03.19

오로라의 신비

준령 너머 트인 하늘 빙하가 남긴 북유럽 피오르*의 땅 세상 티끌 다 씻어 버린 신선들의 고장 밤이면 자작나무 숲에서 요정들이 띄우는 노래 전설의 바람돠어 분다 오로라의 신비 저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생명 가슴 닦아 눈 뜨면 끊지 못한 잘못들까지 이내 말끔히 닦아줄 수정 같은 세상 되찾을 수 있을까. * 피오르: 빙하침식으로 생긴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 와 조성된 지형.

동그라미 2022.03.19

노르웨이의 새벽

성에 서린 차창으로 아련히 번져드는 새벽 깊은 겨울잠 눈꽃으로 피어난 산마루 숲길에는 자작나무의 새하얀 꿈 트롤* 되어 서 있는가 호숫가 물안개 속을 수줍게 거니는 메아리 바이킹의 전설로 자라고 북해 저 먼 바닷가에서 세수하던 아침햇살이 아기미소로 다가오니 모두가 몸을 숨긴다 그리그*의 애틋한 선율 따라 연기 피우던 굴뚝들 돌아앉아 얼굴 가리고 마지막 잎새들 매단 나뭇가지 채 감추지 못한 새하얀 속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다. * Trawl, Troll: 북유럽의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숲의 요정 또는 거인 * Edvard Hagerup Grieg(1843~1907). 노르웨이의 작곡가.

동그라미 2022.03.19

미라벨* 공원

뜨락에 드리운 침묵 거친 역사도 깊은 숨을 고른다 공원 자드락길에 틔운 '정의의 오솔길'엔 검은 공포 속에서 살아난 하얀 가슴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적막을 깨던 발걸음 하나하나를 시로 품어 노래가 되게 한 게오르크 트라클의 어두운 환희들이 대리석 돌판 위에서 자라나 향긋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한줄 한줄 목소리에 담아보려니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 오는 시인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흩날리는 눈발 아래 춤추며 노래하던 분수도 멈추었다 촘촘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낯익은 석상들 멀대같이 서 있던 목양신 하나가 멍한 눈 껌벅거리며 사라져가는 그림자를 쫓는다. * 미라벨 공원: 잘츠부르크 시내에 있는 17세기 바르크 공원. 경내에는 이곳 출신의 시인 Georg Trakl의 같은 제목의 시비가 있다.

동그라미 2022.03.19

눈속의 잘츠부르크

온 누리가 새하얗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삼십년 전 그 해 겨울도 이랬으니 이맘때면 소금성에 사는 하얀 천사들이 얼룩진 세상을 닦아주려고 으레 날아오는 건지 몰라 그리고 땅위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리빛들로 마음을 가락으로 묶어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는 걸테고 날이 밝으면 바로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성채, 성당, 첨탑, 종루, 모차르트 모두가 나서서 말리는듯 하니 어찌할손가 눈발은 점점 더 무더기로 쏟아진다 거리의 악사들이 뽑아내는 바이올린 선율이 잘자흐 강물 위로 애잔하게 흐르고 무지개다리 난간 위는 사랑의 언약을 실은 수많은 자물쇠통들이 침묵처럼 더욱 무거워 보이는 밤 눈길 구석을 맴도는 검은 바람을 보니 이 하얀 눈을 검다고 노래부르던 트라클*의 한숨소리가 가슴을 무너뜨리는데 그의 생가 방..

동그라미 2022.03.19

헤밍웨이 하우스에서

하늘 같은 땅 야자수 그늘 아래 출렁이는 바닷바람 여기는 아메리카 대륙의 새끼손가락 플로리다 키웨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이 머문 곳 잠깐 선술집에 내려갔을까 산책 나간 채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그를 기다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찬찬히 돌아보노라니 망망대해에 작은 삶 풀어 놓고 도전하던 노인의 거친 숨소리 들려온다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 여섯 발톱 가여운 묘공猫公에게 아낌없이 쏟으며 모든 시간을 영원에 꽁꽁 묶어 세운 뜰안 고양이묘지 앞에서 사라지지 않을 신성한 세상을 본다 그가 꿈을 키우던 서재에 앉아 하늘을 보니 마음이 바다가 되어 눈앞의 일이 다 그럴 수 있으리라 파도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동그라미 2022.03.15

그랜드케이먼 섬

검푸른 뱃길 수만리 더 이상 해뜨고 질 자리 없는 카리브 해안 저 멀리 에메랄드 바닷길 위로 왕관차람 솟은 땅 아담이 땅을 일구고 하와가 씨를 심던 그때처럼 그렇게 잠들어 있는 섬 금단의 이 땅에도 문명의 파도 밀려 와 긴 뱃고동 소리에 눈비비고 일어서는 처음 세상 불덩이 땡볕 벌판 코발트 하늘 야자수 아래 어느새 도타와진 정情 아예 큰 자리 펴고 싶어질 무렵 방금 둥근 땅 저편 집까지 전파타고 다녀 온 사람도 있으니 아, 세상은 한 그물코 안에 있어라 새삼 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분다.

동그라미 2022.03.15

마른 바람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마른 바람이 분다 누군가 백태 낀 입술과 혀로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텅 빈 바람만 낯선 휘파람소리 되어 되돌아올 뿐 숲에는 정적만이 구른다 눈매 촉촉하던 누이들의 눈물기마저 메말라버린 지금 누군가 세상 밖 슬픈 이야기를 들고 와 같이 울어 줄 사람을 찾아도 모두가 고개를 돌릴 뿐 촉촉하던 입김만 추억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동그라미 2022.03.15

병상일지

일년 만에 가슴혈관 진찰받으러 낮 병동에 입원하는 날 그간 음식물 가려 먹으며 조심조심 해왔으니 잘하면 그냥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는 간호사의 희망메시지를 거듭거듭 되새기며 첨단장비로 무장한 의사 앞에 옮겨졌다 하지만 좀 두고 보자던 좁아진 혈관은 그대로였고 새로 또 한군데 나빠진 곳이 있으니 말끔히 손을 봐야겠다는 의사의 선언이 떨어지자 재빠른 손길들이 순간과 순간을 넘나든다 팔목 핏줄을 통해 들여보낸 이물질이 자리를 잘 잡았다는 힘 있는 목소리가 혁명군의 환호성처럼 귓전에 메아리치면서 결국 나는 세 군데 스텐트를 박고 홀로 중환자실 구석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눈을 감으니 지나온 일들이 순서없이 오버랩 되고 시간되어 면회온 아내와 며느리를 보니 젖뗀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핑 돈다 내 나이 일흔이 넘었으니..

동그라미 202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