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70

단풍 앞에서

초록단장 싱싱하던 나무들이 양지 비탈길 위에 떨군 잎새들 파도처럼 황금빛 춤사위로 넘실대고 바람 잔잔한 나뭇가지 위에는 아직 다홍치마 선녀들의 상냥한 미소 누가 상실의 이름으로 가을을 노래하는가 저녁을 기다려 하루를 살지 않듯이 가을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 때론 바람이 결에 태워 보내 주고 삶의 마디마디 갈무리 해주니 기다리며 아쉬워하며 애태울 게 뭐람 살아온 날의 즐거움 뒤로 살아갈 날의 꿈이 반짝이노니 지나간 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다가올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저녁 노을빛 속 지금 이 시간이 경기 끝날 무렵 터진 골든골처럼 더 없이 귀한 인생의 축포가 아니랴 그렇기에 아침노을도 단풍빛이겠지.

동그라미 2022.03.09

기도하는 아침

길 잃은 아기노루가 덤불 숲속에서 눈 비비고 일어나 어미를 찾는 아침 새벽이슬에 젖은 한그루 야생화처럼 우리도 눈을 뜨고 당신을 찾습니다 거친 바람 속 넘나들던 지나간 숱한 고난들 모두 가슴에 담고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내온 세월 이제야 하늘 향해 두 손 모아 비나니 모든 잘못, 후회와 미련 안개처럼 거두어 주소서 시들어가던 육신 푸른 마음으로 바로 세우니 눈망울에 스민 햇살 온 누리 골마다 언덕마다 번지면 모든 것 맡기고 새로 살게 하소서.

동그라미 2022.03.09

시간명상

하루를 살아도 한해를 살아도 시간을 모르는 양떼들의 눈망울 저 거울 같은 시간 밖의 세상을 보라 깊고 무거운 첼로의 빈 몸통에서 나오는 긴 한숨소리 시간을 가지고는 잴 수 없는 시간을 재고 있는 사람들아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었을 거야 가까이 올 죽음이 두려워 시간을 만들었을 거야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살면서 죽어가는 건지 몰라

동그라미 2022.03.08

민들레의 꿈

꽃마을 장터로 가는 좁다란 길 모퉁이에 좌판 깔고 조그려 앉은 노란 천사들 딱딱한 지하철 통로 가에 텃밭에서 꾸려온 작은 보따리 풀어 내놓고 고개 파묻은 하얀 머리 노란 얼굴 꼬부랑 할머니 숲속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을 따라 이슬비에 씻어 말린 깡마른 가슴 저녁놀에 날리며 바람 보다 가벼운 텅 빈 보따리 기다리고 기다리는 민들레의 꿈.

동그라미 2022.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