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홍학>

조두환 2020. 3. 17. 15:27

                          홍학

 

                                파리, 식물원에서

 

프라고나르 그림처럼 비친 형상들 속에

그들의 흰빛과 붉은 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 너에게 와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거기에 누워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노라

자상하게 알려주었지, 그들은 푸른 들판으로 나아가

장밋빛 긴 다리 위에 살짝 몸을 돌려놓고는

그 모습 꽃밭에서인양 활짝 핀 몸으로

함께 모여 서 있노니, 프리네 보다

 

더 유혹적인 눈길로 스스로를 유혹하면서

검은빛과 붉은 과일빛 숨겨진 자기들의 부드러운 품에

목을 파묻고 창백한 두 눈도 감추고 있구나

 

갑자기 부러움에 외치는 소리 새장 안을 진동하니

화들짝 놀라 몸을 활짝 펼친 그들

하나씩 환상 속으로 걸어가누나.


Die Flamingos

 

                       Paris, Jardin des Plantes.

In Spiegelbildern wie von Fragonard

ist doch von ihrem Weiss und ihrer Röte

nicht mehr gegeben, als dir einer böte,

wenn er von seiner Freundin sagt:: sie war

 

noch sanft von Schlaf. Denn steigen sie ins Grüne

und stehn, auf rosa Stielen leicht gedreht,

beisammen, blühend, wie in einem Beet,

verführen sie, verführender als Phryne,

 

sich selber; bis sie ihres Auges Bleiche

hinhalsend bergen in der eignen Weiche,

in welcher Schwarz und Fruchtrot sich versteckt.

 

Auf einmal kreischt ein Neid durch die Volière;

sie aber haben sich erstaunt gestreckt

und schreiten einzeln ins Imaginäre.

 

 

*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프라고나르 Jean Honore Fragonard(1732-1806)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시의 톤은 파스텔화의 산뜻한 색채를 바탕으로 흰빛, 푸른빛, 창백함, 검은빛, 과일의 붉은빛 등 감각적인 요소에 집중된다. 그리고 독자의 관심을 흰빛과 붉은빛으로 암시된 홍학 보다는 물에 비친 모습으로 이끌고 간다. 홍학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만, 물은 그것을 완전히 반사하지는 못하고 그저 색깔만 암시한다. 홍학의 빛깔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여인에 대해 언급함(4-5행)으로써 비로소 인식되는 과정과 같다. 신비스럽고 불확실하지만 암시적인 홍학의 모습. 물속의 반영체로서가 아니라 본연의 더욱 중요한 색깔로 다채롭게 나타나 꽃처럼 피어난다. 장미빛 긴 다리 위에 몸을 반쯤 돌리고, 목을 몸에 파묻고 서 있다. 초록빛을 배경으로 하고... 3연은 잠이 들려는 모습, 마지막 연은 보호처인 새장 안으로 밀려들어 온 외부적인 충격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걷는 모습이 제시된다. ‘새장 Volière’은 프랑스어로 시의 장소배경인 파리식물원과 연관된 이색공간규정이다.

   홍학은 화가의 색깔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잠이 깬 정부의 이미지, 즉 요염한 유혹자를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sie war/“noch sanft von Schlaf”(4-5행)에서 ’부드러움‘과 ’잠‘이 연결되고 비몽사몽간의 아름다움은 4C 아테네의 유녀 프뤼네 Phryne를 등장시켜서, 특히 ‘blühend-verführen-verführender'로 이어지는 세 번의 ‘ü’ 음을 통하여 감각적이고 달콤한 감각을 고조시킨다.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 Praxiteles의 모델이기도 했던 프뤼네는 프라고나르 그림의 미인들처럼 외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함몰함으로써 더 높은 나르소스적 유혹의 본체로 나타난다. 세계나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데 그것은 자기 머리를 몸에 파묻고 물속에 비치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는 만족감에 빠지는 홍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기탐닉은 ‘참백함 Bleiche’과 ‘부드러움 Weiche’ 같은 리듬으로, 자기 머리를 부드러운 몸속에 파묻고 날개의 풍부한 색깔은 ‘검정과 붉은 과일 빛’으로 표현된다. 흰빛과 붉음의 미묘한 조화는 안으로 숨겨진 채 ‘흰자위’만이 밖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홍학의 자기애는 외부세계에 의해서 질투의 대상이 되어 “찢어지듯 날카로운 소리”로 반응된다. 이것은 현실이다. 충격으로 깨진 꿈은 바로 그 현실 앞에 서게 하지만 다시 ‘환상 das Imaginäre'로 들어감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표범, 홍학, 백조, 무희, 연금술사, 광인 등 동물과 인간, 그리고 꽃들을 즐겨 서정적 자아로 등장시키는 릴케는 스스로 관찰자, 즉 직관의 인식자로서로서 주관성을 버리고, 모든 지각과 감각의 기능을 떨쳐내고자 한다. “사물이 내게 말한다”고 고백한 바 있는 시인답게 사물을 시인의 눈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사물 그 자체 Ding an sich’를 추구한다. 이를 통하여 사물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을 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사물 속에서 신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신시집』(1907)에 수록된 전형적이 소네트 시로 얌부스(약강격)의 포옹운, 시행은 앙장브망(시행의 문장이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주 구사되어 유연한 흐름을 보여준다. 『말테의 수기』이후 철학적, 예언자적인 시를 쓰던 릴케가 로댕의 영향으로 시에 주체적 자아의 개입을 배제시키고,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 사물시의 대표적 작품.

 

   시는 플라밍고(홍학)라는 단어를 제목에서만 쓰고 그 외에는 모두 대명사로 처리한다. 그만큼 객관화 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다. 홍학은 현실성, 매혹적인 유혹의 몸짓, 꽃과도 같은 아름다움, 자기만족, 자기몰두, 위풍당당함, 휴식하는 모습. 객관적이며 직관적인 표현을 창출한다. 그에 걸맞게 시적 에스프리는 리듬과 단어배열의 문법적인 기술, 자음과 모음의 ‘W’화로 멋있게 구사된다. “아름다운 생각을 모티브를 전달한다”는 주제로 쓴 시는 전체적으로 정적과 소음을 대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면으로부터의 침잠은 ‘거울 속에서’로 부터 ‘환상 속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