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콩 Schwarze Bohnen
오후에 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든다
오후에 나는 책 한 권을 내려놓는다
오후에 나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한다
오후에 나는 무슨 전쟁이었나 까맣게 잊어버린다
오후에 나는 원두커피를 간다
오후에 나는 가루가 된 원두커피를
반대로 다시 모아 예쁜
검은콩으로 만든다
오후에 나는 옷을 벗었다가 입는다
처음에 화장을 하고 다음에 목욕을 한다
노래 부른다 조용히 입을 다문다
Nachmittags nehme ich ein Buch in die Hand
Nachmittags lege ich ein Buch aus der Hand
Nachmittags fällt mir ein es gibt Krieg
Nachmittags vergesse ich jedweden Krieg
Nachmittags mahle ich Kaffee
Nachmittags setze ich den zermahlenen Kaffee
Rückwärts zusammen schöne
Schwarze Bohnen
Nachmittags ziehe ich mich aus mich an
Erst schminke dann wasche ich mich
Singe bin stumm
<해설>
시는 잦은 동사의 사용과 6행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오후에 Nachmittags”라는 부사의 구사로 서술상 특징을 이루고 있다. 꾸밈없고 간결하며 단조로운 톤의 시. 첫 두 행은 독서행위, ‘책을 한 권 손에’ 들었다가 놓는 무상한 행위를 시적 자아는 오후마다 되풀이한다. 3-4행은 ‘전쟁’의 인식과 망각. 시집의 발간 연도로 보아 아마도 ‘베트남 전쟁’이 분명하고, 현재 진행 중인 사실을 오후마다 상기했다가 잊어버린다. 제5행 이후의 후반부에는 무료한 일상생활이 나온다. 원두커피를 갈아서 마시는 오후의 일과에서 ‘가루가 된 원두커피를 반대로 다시 모아 예쁜/검은콩으로 만든다’는 행위는 어떠한 변화도 없고 희망도 없는 현실, 즉 비생산적이고 퇴폐적인 행위를 비춘다. 9-10행에서는 옷을 입고 벗는 행위,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는 행위의 순서가 뒤바뀐다. 마지막 ‘조용히 침묵’하는 행위는 체념을 나타낸다.
서정적 자아는 여성이고, 그에 걸맞는 ‘조용한 저항’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조용히 입을 다무는” 체념으로 끝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적극적인 항거일 수도 있다. 동독 출신으로 공산체제 하에 살았던 시인에게 그것은 국가시책의 근본에 어긋난 것이었으리라. 개성이 무시되는 동독 사회에서의 삶, 무수한 반복을 문제시하고 그 체제의 개선 불가능까지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 키르쉬는 1935년 동독에서 출생, 1973년 서독으로 이주, 작품활동을 해 왔다. 1968년 『서정시를 위한 계절 Saison für Lyrik』에 발표된 이 시는 1969년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제6회 동독 작가대회에서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동독 공산당(SED)의 제4차 중앙회의에서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가 동독 작가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게 되자, 이 작품은 동독 서정시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예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고, 주변의 적극적인 옹호에 힘입어 복권도 이루어졌다. 시각에 따라서 연애 시, 문화시 혹은 정치 시로 읽히는 이 시에 대해 하인츠 체콥스키 Heinz Czechowski는 “사라 키르쉬의 창작에 있어 한 단면을 보여줄 뿐 아니라 1935~1940년 사이에 태어난 동독 작가들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로 손꼽는다. 침묵하는 것은 더 이상 친숙한 공간이 아닌 "존재의 한계상황", 즉 작가로서 아니 하나의 인간으로서 맞는 ‘위기상황 Kriesensituation’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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