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발걸음으로

릴케의 묘지*에서

조두환 2022. 4. 2. 12:01

어디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언덕 바위 위 교회당

저녁햇살이 좀처럼 기울지 않는

산비탈을 따라가면 된다

 

마음이 머물다 바람으로 부는 곳

더 이상 선택이 없는 그 자리에

영원의 이름으로 누우신 당신이여

수염처럼 자란 풀밭 위

비석 모퉁이에 걸린 얼굴을 바라보면

막혔던 응어리가 풀리고

금방 시가 쏟아질 것만 같아라

 

묶이고 매이는 것이 싫어서일까

세상에 머물게 해준 고마움 때문일까

핏빛 보다 짙게 남긴 삶의 발자국

그 이름에 비하면

잠자리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영원히 손님으로 살다간

세상의 나그네여

당신은 왜 그처럼 수줍게 사셨습니까?

 

여린 손가락 가시에 찔려

죽음을 바친 죽음으로

삶을 사랑하던 당신이여

비석 옆 십자가 밑에

"순수한 모순으로"

잠들며 피어난 장미 한 송이

참을 수 있는 아픔 이상

아프게 서린 입김으로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을

지금도 노래 부를 수 있을까.

 

 

* 스위스 발리스의 한적한 마을 라론 교회당 뜰에 있다. 미리 유언 삼아 써둔

짤막한 3행시 "오, 장미, 순수한 모순이여/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움이여"가

새겨진 비명 아래 시인은 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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