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시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여가시간>

조두환 2020. 9. 20. 16:17

잔디 깎는 기계, 순간들을

참수하는 일요일과

 

풀은 자란다

죽은 풀 위로 자라난

풀을 죽이고

 

누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랴!

 

기계가 윙윙 거린다

아우성치는 풀을

소리로 짓누른다

 

여가시간은 살쪄간다

우리는 싱싱한 풀을

느긋하게 깨문다.

 

freizeit (Hans Magnus Enzensberger)

 

rasenmäher, sonntag

der die sekunden köpft

und das gras

 

gras wächst

über das tote gras

das über die toten gewachsen ist.

 

wer das hören könnt!

 

der mäher dröhnt,

überdröhnt

das schreiende gras

 

die freizeit mästet sich,

wir beißen geduldig

ins frische gras.

 

 

<해설>

 

시집 『맹인 책자 blindenschrift』(1964)에 수록된 시. 일요일에 잔디를 깎는 한 남자의 평화로운 영상이 주제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접촉마저 꺼리는 현대인의 개인주의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잔디를 깎기 위해서, 그러나 이웃에 대한 배려나 사랑은 없이 한낱 자기 영역 확보에 지나지 않는다. “참수한다”는 행위는 풀을 잔인한 방법으로 기능화 내지 규격화시켜 ‘아름다움’을 제조해내려는 행위일 따름이다. 풀은 죽은 것 위에서 또 자라난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위에서 살다가 또 죽는다.

엔첸스베르거는 1929년 남독 알고이 지방 가우프보이렌에서 태어나 노르웨이, 베를린 등지에서 살았다. 1955년 에어랑겐 대학에서 브렌타노 서정시 작품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남부 독일 방송 주필, 울름대학 객원교수, 수르캄프 출판사 사장을 지냈다. 시, 에세이, 비평,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문필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늑대의 방호 verteidigung der wölfe』(1957), 『나라말 landessprache』(1960)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