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알자스를 돌아 보면서

조두환 2020. 5. 3. 14:57

알자스를 돌아보면서

 

                                                                     솔뫼  조 두 환

 

 

 

 

 

  독일과 프랑스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스위스의 국경도시 바젤. 시 외곽에는 두 나라로 통하는 길이 있고, 그곳 검문소를 거쳐 국경을 넘게 된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곧 민가가 나온다. 나라가 바뀌어도 긴장감 같은 것도 없고 그냥 시내를 산책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래 전 그곳에서 유학하던 때 나는 주말이 되면 유일한 여가선용방법으로 종종 이런 국경넘이 산책여행을 즐겼다. 걸어서 프랑스 땅에 들어가 알자스의 평야지대를 두루 돌아보고 오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생 루이 St. Louis라는 도시에 닿으랴 치면, 이상하게도 모든 건물들이 이쪽 너른 벌판을 등지고 돌아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한사코 자기들 안의 어떤 구심점을 향하고 있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졌고. 나는 나름대로 그걸 향토애와 자존심으로 이해했다.

  내가 이 지방과 특별히 친숙하게 된 것은 T 신부 덕분이었다. 당시 기숙사 사감이자 카운셀러로 있던 그는 주말이 되면 이곳으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크고 작은 예배당을 순례하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던 그분은 그때마다 나를 불러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셀레스타, 마리엔슈타인, 델레몽 같이 쉽게 가보기 힘든 라인 강 상류의 크고 작은 마을들과 교회당들을 두루 섭렵했다. 12세기에 지어진 로마식 교회당과 바닥기둥 밑을 지키는 호엔슈타우펜의 사자의 모습, 천연동굴 안에 마련된 소박한 제단, 더욱이 그 한가운데 아기예수를 품어 안은 마리아 상과 참배객들이 밝히고 간 촛불들이 가물가물 타고 있는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화려한 세상 빛깔들은 시산이 지나면 싫증도 나게 마련이지만 어둠 속에 깃든 경건의 색채는 한결같고 영원하다. 나날을 긴장감 속에 살아야만했던 유럽생활초년생의 가슴에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던가. 그 이후로도 유럽에 갈 때면 빠짐없이 이곳을 들러보곤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은 차창에서 내다보는 이곳 경치였다. 야트막한 산야와 오밀조밀한 바위형상, 굽은 나무들, 곳곳에 굽이굽이 흐르는 작은 시내....... 정말이지, 마치 고국산천 어디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의 경치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말하자 신부님 자신도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가 당신의 눈에 보이는 엑소틱한 매력 때문이라고 하니 한국과 알자스의 친화력은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알자스로렌은 철 생산량이 많고 농업작황이 활발한 기름진 땅이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이웃 나라들의 다툼이 잦았다. 9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로 출발하여 신성로마제국의 멸망, 30년 전쟁(1618~48), 프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1871),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번갈아 프랑스와 독일로 귀속되는 기구한 역사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며 곧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et(1840~1897)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이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 더 이상 모국어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없게 된 한 교사의 비장한 목소리, 초롱초롱한 어린이의 얼굴, 드디어 프러시아 군대의 나팔소리가 들려오자 선생은 칠판에다 크게 프랑스 만세!’라고 쓴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 실린 이 글을 읽으면서 모국어를 빼앗기는 망국의 설움과 고통을 뼈저리게 되새겼던 생각이 난다. 일제의 폭정과 질곡에 시달리던 우리나라의 운명과 다름이 없었던지라 더욱 그랬었다.

  아기자기한 골목길마다 끊이지 않는 관광객들의 행렬, 특유한 전통가옥 사이사이로 풍겨나는 예술의 향취. 거기에다가 항상 무언가 소외와 상실의 바람이 느껴져 마음이 휑하기도 했다. 안채를 다 내준 퇴락한 귀족의 쓸쓸한 모습을 보는 듯 해서일까? 멀리 눈길을 돌려 보았다. 국도 위로 뽀얀 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세력경쟁의 완충지로 삼아 온 이곳에는 원래 자생적인 이색고유문화가 있었다. 토착어인 알자스 말이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어 방언에 가까운 알자스 어는 원래 매우 다정다감한 음색을 지니고 있어 이 지방 사람들이 특별히 애착심을 갖는다고 스위스의 지인들이 종종 입버릇처럼 말하는 걸 들어왔던 터였다. 이 말은 어찌 보면 그들의 정신토양이자 정체성의 근원은 따로 있는데, 이런 그들에게 그간 줄곧 프랑스 말과 독일어가 강요되어 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이곳에서는 국가시책에 따라 후세대에게는 프랑스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토착어에 대한 친화력이 높다. 실상 내적으로 독일의 점령에 대해서도, 프랑스의 동화정책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취해온 이들로서는 단순히 지정학적인 불리함으로 쉽게 넘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 알자스 사람들은 두 개의 언어 사용 시민운동을 펼쳐 1982년에는 독일어도 자유로이 가르치고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매우 전향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알자스 사람들이 역사의 격변을 겪어 오면서 진정 어떤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어떤 난관을 뚫고 나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연민의 정이 더욱 깊어진다. 아직도 편안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우리의 입장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사뭇 의연하게 서 있는 알자스의 모습이 든든해 보인다. 어제와 오늘,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겪은 운명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유럽의회와 주교좌의 소재지인 슈트라스부르크를 발판으로 거대한 EU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정치판도에 따른 상처 대신,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삶의 꽃을 피우며, 드높은 이상으로 두 문화를 아우르며 제 자리를 찾아나간다. 문화적 비무장지대라는 숙명적 현실을 더욱 기름지게 발전시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멀리 우리의 자화상을 되비쳐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