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조두환
기차는 루드비히스부르크를 지난다. 슈바벤 지방 바로크 문화의 꽃으로 이름난 도시다. 시간은 9시 7분. 아침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바쁜 일상의 시작이겠지만 나는 지금 한 달여를 머물던 독일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나의 슈바벤 문학 산책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이동하는 바로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된다. 출국시간이 오후이니 오전 시간에 마저 이삭줍기를 해야지. 열차 내 판매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언뜻 우리말인가 했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지만, 사람 사는 모습의 근본은 같다는 걸 새삼 느낀다. 문득 창밖을 스치는 지역은 비티히하임-비씽엔, 주위에는 온통 포도단지가 가득하다. 샛강(내)을 품어 안고 있는 산경치가 절경이다. 저 아랫마을은 어머니 품속에 안긴 아기와 같다. 그런 이 네카어 강가에 무진장의 석탄이 퇴적되어 있단다. 축복받은 땅이다. 드디어 하일브론 시가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고장 슈바벤의 노른자위 땅. 문학적인 만남이 꼭 필요한 곳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명작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Kätchen von Heilbronn』 때문으로,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Heinrich von Kleist(1777–1811)의 작품이다. 작가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대학 독문과 4학년 때, 몇몇 학우들과 문학작품독회를 만들어 책을 같이 읽었다. 당시 나를 포함해서 한석종, 김승옥, 윤용호, 임호일 등 다섯 명의 멤버들이 진지한 학구열을 불태웠는데, 모두가 그동안 교수와 학자로서 우리나라 독문학계에서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였으니 참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그때 읽게 된 것이 단편소설 「칠리의 지진 Das Erdbeben von Chili」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가 쓴 8편의 단편소설들은 감정표현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격정적이어서 당시의 정서 상태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거부감을 말끔히 씻어준 것이 바로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이었다. 1807/08년 작품이 완성되어서 1810년 오스트리아 빈의 무대에 올린 5막 극은 주인공 소녀의 집요한 외골수적 성품으로 보면, 작가 특유의 ‘고집’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겠지만, 여성의 미덕과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젊은 가슴에 짙은 동경의 그림자를 안겨다주었다. 그것은 『펜테질레아』(1808)라는 또 다른 작품과 여러 면으로 비교되기도 한다. 두 작품이 ‘광적인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한 가닥인 듯하지만 펜테질레아가 극단적 광기의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었다면, 케트헨은 절대선이자 성녀로 형상화 되었다. 그래서 전자에 대해서는 소위 비토세력이 엄존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대중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아 무대에도 자주 올랐다. 이런 까닭으로 작품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도시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해왔다. 나는 이제 바로 그 현장에 와 있는 것이다.
하일브론의 무기대장장이의 딸 케트헨은 사랑스럽고 자애로운 소녀(여인)이다. 어느 날 자기 집에 갑옷을 수리하러 온 슈트랄 백작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는 아버지와 약혼자를 버리고 무작정 그를 따라 나선다. 슈트랄은 그녀를 돌려 보내려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가 페터 폰 슈트랄 백작이었다. 게다가 천사가 나타나 그를 그녀의 신랑으로 지목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백작도 꿈을 꾸게 된다. 장차 황제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런 중에 하일브론의 대장장이 테오발트는 케트헨이 슈트랄 백작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을 받들듯 따르고 있는데다가 갑자기 부친의 명은 거역하면서 백작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백작의 불순한 마술에 걸린 것이라 단정한다. 곧 그는 곧 백작을 고발, 재판을 통하여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에게 이끌려 수녀원으로 향하던 케트헨은 우연히 슈트랄 백작을 공격하려는 무리의 작전 계획을 손에 넣게 된다. 그 덕택으로 생명의 위기를 모면한 백작은 또한 우연히 숲속에서 잠든 케트헨을 발견, 그녀의 잠꼬대를 듣게 된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게 되자 케트헨이 왜 자기를 그토록 집요하게 따라다녔는지, 그 끌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린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쿠니군데. 케트헨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과 쿠니군데의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백작은 케트헨에게는 매정하게 비신사적으로 대하고, 쿠니군데에게는 기사도 이상의 무한한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사실 슈트랄 백작의 마음속에는 이미 케트헨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케트헨, 아가씨, 케트헨! 왜 난 널 내 사랑 이라 말하면 안 된단 말인가? 왜 나는 널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향기로운 침상으로 데려가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거침없이 “내가 케트헨 같은 여인을 반려자로 맞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모든 말을 배워 그 나랏말로 신을 경배하겠노라”는 속마음까지 토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채에 불이 난다. 중세기에 진실을 밝히는 데 쓰이던 ‘불에 의한 신명재판’이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다. 백작은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중,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케트헨이 그의 칼과 방패를 찾아다준다. 더욱이 불구덩이 속에서 멀쩡한 몸으로 살아나서, 쿠니쿤데가 그렇게도 찾아내야한다고 아우성치던 백작의 사진까지도 가지고 나온다. 하늘에 의해 보호받고 있음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 반면, 정작 쿠니군데가 찾은 것은 슈트랄 백작과 연관된 슈타우펜 가의 재산증여문서였다.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이 기적 같은 상황에서 밝혀진다. 케트헨과 백작 간의 참된 대화는 그녀의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특유의 현실과 꿈의 교차교류라고 할까? 일종의 가면상태에서 두 사람에게 배우자에 대한 계시가 나타난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신분차이도 동화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해소된다. 황제는 자신이 젊은 시절 하일브론에서 한 여인을 취했는데, 그 결실이 바로 케트헨이란 사실을 고백한다. 백작은 비로소 황제의 딸은 쿠니군데가 아니라, 케트헨임을 알게 된다. 케트헨을 독살하려는 음모, 인위적으로 조작한 자신의 미모 등 쿠니군데의 악행도 드러난다. 결국 백작은 쿠니군데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결혼식장에서 케트헨을 신부로 맞아들인다. 포도밭과 슈바벤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 네카어 강 연안 하일브론이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741년.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궁전을 지었다. 1281년에 제국의 자유시가 되었다. 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 소재지이기도 한 ‘하일브론’은 ‘거룩한 샘’이란 뜻의 ‘하일리히브론 Heiligbronn’에서 유래되었다. 도시는 말 그대로 샘, 우물, 분수의 아우라이다. 상 킬리아 교회의 높은 제단 밑에는 바로 그 거룩한 샘이 솟아난다. 광장에 설치된 ‘7관의 샘물’은 도시의 혈관이자 생명인 것 같이 느껴진다. 곳곳에 고대 로마문화의 흔적이 살아 있다. 도시가 일찍부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수자원. 라인-네카어 수로에 좋은 항만시설을 갖추게 되면서 비옥한 땅에 과일, 채소, 포도가 잘 자라고, 금속, 포도주, 기계제작 등 제반 산업시설도 풍부하여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도시의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 것은 절개 곧고 부지런한 이곳 여인들이었다. 바로 ‘바이버트로이 Weibertreu’ 전설이다. 11세기경 도시가 벨프(교황당)와 바이프링크(황제당) 사이의 세력다툼에 시달릴 때, 도시가 황제당인 콘라드 3세에게 정복당하면서 도시의 남성들은 모두 포로로 감금되고 말았다. 그 때 황제는 남은 여성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들이 짊어질 만큼만의 귀중품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 그러자 여성들은 한 결 같이 감옥에서 자기 남편들을 끄집어내 등에 업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 포도밭의 언덕 위에 지금도 폐허로 남아있는 이곳을 ‘정숙한 아내들의 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매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와인 축제가 열리는데, 그 절정은 시가행진. 당시를 회상하여 여성들이 남성을 등에 업고 거리를 누빈다. 클라이스트는 이곳 출신이 아니다. 멀리 오데르 강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프로이센의 귀족으로 이어지는 군인 집안이었으며, 그도 어릴 때 근위연대에 들어갔다. 1799년에는 군적을 떠나 대학에서 칸트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한계를 깨닫고 학업과 약혼자를 버리고 방랑생활에 나선다. 독일 국내는 물론, 스위스, 이탈리아 등을 전전한다. 고집 세고 철저한 성격으로 현실과 잦은 충돌을 하던 그는 그래도 꾸준히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 나서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고 보니,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클라이스트의 작품이 나올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겠다. 하일브론 시에는 오늘날에도 자신의 애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며 행동하는 여인들의 기가 살아 있다. 클라이스트가 재생산해낸 문화콘텐츠 ‘케트헨 이미지’는 뵈티거에 따르면, 작가가 이 이야기가 담긴 민중문학본 책자를 1819년 어느 시장구석에서 발견하여 작품을 민속전설의 뿌리와 연결시켰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케트헨이 실재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대충 세 여인으로 압축되고 있다. 모두가 이곳 여인의 정숙함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여인들이다. 우리나라의 진주(논개)와 강릉(신사임당) 만큼이나 메트리아크 Matriarch로서 이곳 사람들의 정신문화를 담아내는 바탕이다. 첫 희곡작품 『슈로펜슈타인 가』(1803)를 비롯하여 『암피트리온』(1807년), 『로베르트 귀스카르트』(1808),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프러시아의 애국정신을 고취한 『헤르만 전투』(1808)와 『홈부르크 공자』 등에 이르기까지 클라이스트는 독일정신을 구현하는데 앞장섰다. 한 때 하급관리로 일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부패 재판관을 풍자한 희극 『깨어진 항아리』(1804)도 독일인의 정의로움을 일깨우기 위한 정신의 소산으로 평가된다. 그는 로만티시즘으로 근대 리얼리즘의 탄생을 준비한 특이한 작가이다. 따라서 문학사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어느 한쪽도 아닌 독자적 영역의 작가로 자리매김 된다. 그러던 중 그는 모종의 사건으로 베를린 교외의 강변에서 어느 유부녀와 함께 권총자살로 일생을 마친다. 사회적인 좌절과 조국의 굴욕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그를 파멸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다. 시는 1991년 ‘젬트너 Sembdner 클라이스트 자료실’을 설치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물론, 민속적인 분야에 이르는 전반적인 자료의 수집 및 보관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케트헨을 도시의 아이콘으로 부각시켜 이미지 확립에 힘쓰고 있다. 1970년부터 축제에서 ‘하일브론의 케트헨’ 두 사람을 뽑아 시의 대표사절로 삼고 있다.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각종 케트헨 퍼레이드도 있다. 78개나 되는 다채로운 케트헨 형상물들이 시내를 가득 채운다. 전설 속의 여인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하일브론의 현실 속에 꾸준히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
'문학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의 하얀마을 (0) | 2020.05.06 |
---|---|
부다페스트의 꿈 (0) | 2020.05.05 |
알자스를 돌아 보면서 (0) | 2020.05.03 |
메르헨 가도 (0) | 2020.05.03 |
베츨라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 2020.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