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기」

조두환 2020. 11. 5. 14:45

난 알고 있지. 운 좋은 사람만이

사랑을 받는다는 걸. 그런 자의 목소리는

모두가 귀담아듣지. 그런 자의 얼굴은 때깔도 고와

 

마당의 뒤둥그러진 나무는

토양이 나쁜 탓이려니.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만 못났다고 야단이야

아무 거리낌도 없이

 

해협의 푸르른 보트와 멋진 요트 따윈

내겐 보이지도 않아.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

어째서 난 중년이 넘은 소작 여인이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모습만 보고 있는 걸까?

아가씨들의 탱탱한 가슴팍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 짜릿 달구기만 하는데

 

내 노래에 운율을 다듬어 넣는다면

아마 시건방 떠는 걸로 보일지 몰라

 

내 마음 속에서 서로 다투고 있는 건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끔찍스러움이야

하지만 나중 것만이

나를 대번 책상머리에 앉게 하지.

 

Schlechte Zeit für Lyrik

 

                             Bertolt Brecht

 

Ich weiß doch: nur der Glückliche

Ist beliebt. Seine Stimme

Hört man gern. Sein Gesicht ist schön.

 

Der verkrüppelte Baum im Hof

Zeigt auf den schlechten Boden, aber

Die Vorübergehenden schimpfen ihn einen Krüppel

Doch mit Recht.

 

Die grünen Boote und die lustigen Segel des Sundes

Sehe ich nicht. Von allem

Sehe ich nur davon

Daß die vierzigjährige Häuslerin gekrümmt geht?

Die Brüste der Mädchen

Sind warm wie ehedem.

 

In meinem Lied ein Reim

Käme mir fast vor wie Übermut.

 

In mir streiten sich

Die Begeisterung über den blühenden Apfelbaum

Und das Entsetzen über die Reden des Anstreichers.

Aber nur das zweite

Drängt mich zum Schreibtisch.

 

 

*

   장식 없는 냉엄한 현실이 지배한다. 시의 운율조차 ‘시건방 Übermut’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적 표현을 삼가야 할 분위기다. 일상적인 현실이 왜곡된 경직 상태에서 서정적 자아는 호소한다. 힘 있고 백 좋은 승자들이 독식하는 세상, 그런 것들만 눈에 들어오지만 시인은 그런 걸 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대신 찢어진 그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빵을 버는 어부들, 40대 소작 여인의 굽은 허리를 따뜻한 눈길로 돌아보겠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편향성 때문에 행복이라든가 아름다움이 얼마나 훼손되며, 가난한 자 뒤에는 얼마나 많은 불편부당함과 슬픔이 있는가를 노래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는 시인의 마음속에서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격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갈등을 일으킨다. 가난한 자의 궁핍과 칠장이의 범죄적 발언이 극한적으로 대립되는 상황은 서정시를 포기하고, 사회참여를 촉구하는 항변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칠장이’는 독일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젊은 시절에 꿈꾸다 좌절된 화가의 길과 세상을 분탕 칠한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노동계급을 무력화시키려는 파시즘 세력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그의 좌경적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브레히트가 토해내는 양심적 선언이라 이해하는 측면도 강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학창생활을 거쳐 뮌헨의 한 극회 고문으로 있다가, 마르크시즘에 경도, 쿠르트 바일, 한스 아이슬러, 파울 힌테미트 등과 함께 일했다. 그리고 한 때 스위스, 덴마크, 핀란드, 미국 등지로 망명, 1947년 동 베를린으로 귀환하여 ‘베를린 앙상블’을 세웠다. 여기에서 그는 '서사극 das epische Theater'의 새로운 이론을 전개시켜, 문학은 감정이나 형태의 문제가 아닌 ‘사상 전달의 원천적 발짓’이라고 말하면서 냉철한 비판적, 풍자적 관점을 강조한다.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권리를 빼앗긴 자의 운명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무정부주의적 냉소주의를 체질화하는 담시, 소네트, 송가 형식 등을 교육(교습)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그는 중국문학을 비롯하여 루터, 셰익스피어, 비용, 랭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