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이야기 -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물던 어느 해 여름,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가 숨을 거둔 집 앞에 섰다. 그의 눈길이 남아 있을 인근의 교회도 둘러보았다. 서른 한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그곳에서 나는 이미 차가운 겨울 냄새를 맡고 있었다.
빈을 떠나 독일로 향하던 길에 상 푈텐이란 작은 도시를 찾았다. 시인 릴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서였지만, 시내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문득 “1821년 가을 슈베르트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당시 스물다섯 살의 그는 한창 찬바람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처럼 슈베르트가 줄곧 겨울이라는 시간 속에서 연상되는 것은 대표작 『겨울 나그네 Die Winterreise』(원래 '겨울 여행'이지만 의역을 해도 참 잘했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탓일까. 그는 죽기 1년 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곡을 끝냈다. 테레제 크로프를 향한 사랑도 뼈아픈 슬픔으로 마감되고, 극심한 근시안인 데다가, 체격이 왜소하고 표현조차 어눌하여 항상 주변의 인물로 밀려나 있었던 그 사람. 이미 3년 전 낭만주의 시인 빌헬름 뮐러 Wilhelm Müller(1794-1827)가 써 놓은 연작시집을 발견하고 곡을 붙였다. 어쩌면 작곡가의 생애를 그리도 잘 대변해주는지 놀랍기 그지없는 시인의 쓸쓸한 어휘는 슈베르트의 멜로디를 만나 애절함을 더한다.
총 24편으로 된 『겨울 나그네』는 실연을 당한 청년이 연인의 집 앞에 작별의 말을 써놓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애수가 물든 작품은 전편을 함께 부르고 들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 「보리수」만은 예외로 치는데, 그 까닭은 “성문 앞 우물가”의 나무 그늘이 단꿈을 꾸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서 작품 전체의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찬바람이 불어와/얼굴에 몰아치는데/모자를 날리어도/줍기가 싫었네”(5연)라고 노래 부르는 방랑자의 시간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이고, 새하얀 눈이 덮인 길 위에는 두 줄의 고독한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유럽의 겨울은 무겁고 깊다. 오후에 접어들기 무섭게 사방은 어둠에 휩싸이고, 저녁 6시쯤이면 시내의 상가도 모두 문을 닫아 온통 적막뿐이다. 그 길고 지루한 밤을 어떻게 넘기느냐 하는 걱정, 그에 따른 우울증과 약물복용을 염려하는 사회적 차원의 목소리도 커가고 있고.......
오래 전 나의 스위스 유학시절이 생각난다. 외국인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성탄 절기를 어디서 보낼까 궁리하던 끝에 빈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겨우 이틀 밤을 보냈던가. 어쩔 수 없이 나는 바로 성탄절 전야에 되돌아오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한밤중에 린츠에서 내렸다. 하루 밤을 묵고 갈 생각으로 역 안내소에 들러 제일 값싼 숙소를 알아보았다. 서둘러 찾아간 곳은 행려자들을 위한 숙소쯤이었던 것 같다. 질겁하고 뛰쳐나왔을 때에 나는 비로소 내 손에 잔돈푼까지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할 수 없이 역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넘겼다. 크리스마스 새벽이었다. 술 취한 사람들의 입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차라리 절규라고 표현해 두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사회의 언저리에서 추위 속에 삶의 군불을 쬐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벽 첫차를 탔다. 무턱대고 인스브루크에서 내렸다. 넘쳐흐르는 나의 여행 욕망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나. 알프스의 한가운데에 우뚝 선 꿈의 도시를 그냥 스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온 주위를 에워싼 적막의 두께, 그것을 가르는 내 발자국 소리. 싸늘한 새벽바람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푸드득 새가 난다. 춥고 긴 겨울밤을 인내하다가 새벽을 맞이한 것이다. 둥지를 박차고 오를 그 시간을........ 아, 세상의 미물도 자연의 순리를 따라 이 추운 날을 대비하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 사람인 나는 마땅한 기다림과 인내도 없이 외로움을 피해 이런 헛된 발걸음을 하고 있다니. 나 자신의 진정한 새벽은 어디 있는가. 갑자기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즐겨 『겨울나그네』를 듣는다.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겨울체험 때문이 아니라, 삶의 겨울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 예술가의 혼을 통해 숱한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이다. 생활의 방편 모두를 훌훌 털어 버리고 음악에 몸을 내던진 청년 슈베르트. 그로 하여 그는 더욱 춥고 긴 겨울을 견디어야 했지만 구슬 같은 선율들을 남김으로써 얼어붙은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는가. 눈을 그리려면 눈보다 주변을 잘 묘사할 수 있어야 하듯이, 추운 겨울을 그리려면 상실과 절망의 아픔보다 더 쓰라린 인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리라.
이파리들을 다 내리고 외로이 서 있는 겨울나무들, 그런 쓸쓸함 속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 산처럼, 우리도 모든 걸 덜어내고 본래의 얼굴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산비탈에서 외로움과 싸우는 나목의 치열한 시간도 알아야 한다. 한 겨울의 방랑은 그런 진실을 찾는 순례이어야 하겠고, 그러면 이 겨울에 추위에 떨고, 외로움에 우는 나와 이웃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의 계절로 되돌릴 참된 겨울 앞으로 나설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