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츨라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출라 중심상가 길목
베츨라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솔뫼 조두환
“아무튼 나는 이곳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네. 이 천국 같은 곳에서
고독은 내 마음에 고귀한 조건이 되고 있지. 그리고 이 젊음의 계절은 가끔
불안에 떨게 되는 내 마음을 온갖 넉넉함으로 훈훈하게 해 주고 있네. 모든
나무와 울타리는 꽃다발이 되었지. 그러니 나는 차라리 풍뎅이가 되어, 좋은
향기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양분을 찾고 싶다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 헤센 주의 작은 도시 베츨라를 배경으로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작품 속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가슴 속 깊이 연모하던 여인 롯데.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곧 깊은 절망감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듭되는 번민은 결국 그를 권총자살로 내몬다. 젊은이의 슬픈 이야기는 독일 질풍노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괴테는 1771년부터 1775년 까지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지내는 동안, 1772년 5월 법률연수 차 이곳을 방문한다. 그리고 곧 샬롯데 부프 Scharlotte Wuff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작품 속 롯데의 실재인물이다. 소설에 표현된 대로,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괴테는 이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하다가 그해 9월 아무 말 없이 베츨라를 떠난다. 2년이 지난 1774년 25세의 나이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세계적인 대문호의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이다.
베츨라는 독일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꼭 방문하고 싶어 하는 대상지가 되었다. 2013년 1월 9일 나도 이곳을 찾았다. 작품으로 그려진 이상의 세계를 현실에서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 환상이나 이상, 꿈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구체적인 확인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가는 길은 마침 고전문학의 고향 풀다 Fulda를 거치게 되어 있어서 좋았다. 대신 시간이 사뭇 늦었다. 워낙 해가 짧은 독일의 겨울인지라 마음도 급했다.
기차에서 내려 외곽버스를 타고 시내로 진입하니 기대했던 대로 아담한 도시의 정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현대적 교통시설이 두루 갖추어진 바깥 풍경, 그러나 안은 시대초월의 이상향을 보는 듯, 갑자기 모든 체계가 중세기의 인식모드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베츨라가 도시형성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BC 5세기경. 12세기에 이르러 신성로마제국의 자유제국도시로서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원래 “Wetzlar"의 "―lar"는 켈트-프랑켄 말로 ‘목제방호벽’을 의미하는 만큼 도시는 일찍부터 계란의 노른자위처럼 외침에 대비한 도시방어의 의미를 크게 키웠다. 근교의 칼스문트 성 폐허지가 바로 호엔슈타우펜의 바르바로싸 황제(1152–1190) 당시, 그 목적으로 건립한 성이 아니었던가. 베츨라는 제국영주를 세우고, 이곳 시장권을 장악, 프랑크푸르트와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다. 그 후 수도원이 창건되고, 제국대법원이 옮겨오는 등 크게 번창했다. 1806년 제국의 해체 후에는 대법원 대신 법률학교가 자리 잡았다. 법조인으로서 괴테가 이곳을 찾아 온 충분한 이유이었다.
롯데하우스 앞에서의 필자
괴테의 체취가 시대를 초월하여 곳곳에서 느껴진다. 줄지어 있는 목골가옥, 굽은 거리, 아담한 언덕길.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불쑥 괴테가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우선 작품과 연관된 현장을 찾았다. 누구에게 묻기보다 감각에 의존하여 걸었다. 작품 속의 상황을 생각하며 괴테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발걸음은 자연스레 바로 롯데가 살았다는 집 앞에서 멈추었다. 18세기 당시의 시계가 내 마음 속에서 새로운 현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소는 ‘롯데가 8번지’. ‘롯데하우스’라는 이름 붙여진 관광명소였다. 괴테가 머물던 곳은 여기서 걸어서 불과 2분 거리. 물론 집 앞에는 그가 이곳에 체류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팻말이 붙어 있다. 괴테 선생이 이웃아저씨의 모습으로 곧 문을 열고나올 것만 같다. 그가 쏟아내던 사랑의 밀어들이 파도처럼 가슴에 밀려든다.
“사랑하는 롯데. 나는 창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소.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사이로 영원한 하늘의 별들이 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오. 그
별들은 지지 않으리라.”
워낙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속에 묻혀 살던 괴테였던지라 롯데의 모델은 반드시 샬롯데 부프 한사람만이 아닐 수도 있다. 특히 바이마르에서 사랑에 빠졌던 샬롯데 폰 슈타인 부인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숭고한 사랑의 감격으로 휘몰아 간 베츨라의 이 여인은 지성적인 괴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프랑크푸르트 자기 집에서 집필하는 동안 롯데의 실루엣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방안을 오갈 때마다 인사를 했다던 오직 그 여인. 적장 나폴레옹이 치열한 전진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었던 그러한 마력이었으리라.
그녀는 친구 케스트너와 약혼한 사이. 그 사랑은 현실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마음속의 순수한 사랑과 엄정한 사회제도와의 충돌. 그 절망상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간 괴테에게 마침 그해 베츨라의 친구 예루살렘이 한 유부녀를 사랑하다가 권총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전해진다.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불과 14일 만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이란 청년이 1772년 10월 30일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적은 현판이 붙은 예루살렘 하우스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금방 들려온 총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롯데, 나는 이 옷을 입은 채로 묻히고 싶소. 당신의 손길이 닿은 성스러운 것
이니까요. (...) 사람들이 내 주머니를 뒤지지 않도록 해주시오. 주머니 속에 들
어 있는 이 연분홍색 리본은 애가 아이들 가운데 있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이 가슴에 달고 있었던 것이라오.”
사랑이란 합리적 이해타산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운명적인 현실이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그런 계시에 따라 이 땅위에 살다가 사라져갔다. 이곳 거리와 롯데하우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전시회, 연주회, 문학작품 낭독 등 각종 집회가 열린다.
멀리 아우구스트 황제 당시의 로마유적지들, 가까이는 두 차례 세계대전 중 입은 피해, 그러면서도 라이카, 짜이쓰 등 독일 광학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까지, 대성당과 시청사를 중심으로 '그냥 두기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관광명소로서의 도시는 좁은 골목길들과 함께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격정의 이야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겨울비가 내린다. 순식간에 지는 땅거미. 겨울밤을 밝혀 줄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이 롯데의 길을 비추고 있다. 당시 소설을 읽고 감동한 젊은이들 사이에는 베르테르가 입었던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가 대유행이었다. 실연이나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도 연이어 일어났다.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말도 생겼다. ‘롯데’라는 이름으로 크게 성공한 우리나라 재벌도 생각하면서 베츨라 거리를 걷는다. 괴테는 문학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상쾌한 기분을 되새기며.......(*)